구원론 제6강

중생 (거듭남)

총신대학교 신학과 박재은 교수

01. 성경의 가르침

"교의학자는 모든 교리에서 고백의 언어를 사용하지만, 교리는 반드시 소리가 아니라, 하나님의 계시사상에 기초해야 한다."

- 비빙크, 『개혁교의학』

"회심, 믿음, 기도, 칭의 등이 진실로 무엇인지, 심리학이나 종교철학도 설명할 수 없다. 오로지 성경만이 설명할 수 있다."

- 비빙크, 『개혁교의학』

중생(重生)을 의미하는 '팔린게네시아' (παλινγενεσία)

이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단 두 번만 나타납니다. 'renewal', 'rebirth', 즉 '새롭게 됨', '갱신', '거듭남'을 의미합니다.

"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(<strong class="text-teal-600">παλιγγενεσία</strong>)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" (마 19:28)

"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(<strong class="text-teal-600">παλιγγενεσία</strong>)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" (딛 3:5)

중생의 개념은 신약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, 구약 성경에 이미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. 예를 들어, 시편 51편 10절의 "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"라는 고백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.

02. 중생과 세례

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

세례가 중생 보다 <strong class="font-semibold">앞선다</strong>

교회는 사제를 통해 세례의 성사 가운데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'주입된 은혜'를 분배한다고 봅니다. 즉, 세례라는 외적 의식을 통해 중생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.

종교개혁 신학의 입장

중생이 세례 보다 <strong class="font-semibold">앞선다</strong>

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(단동사역)이며, 세례는 이미 일어난 중생의 표와 인입니다. 중생은 논리적으로 믿음과 회개에 선행합니다.

구원의 서정 (Ordo Salutis) - 논리적 순서

부르심
거듭남
회심 (믿음, 회개)
칭의
양자
성화
견인

개혁주의 신학은 구원의 각 단계들이 논리적 순서를 가진다고 봅니다. 여기서 '거듭남(중생)'은 '회심'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역사입니다.

03. 중생에 대한 개념 구별

<span class="tag">1</span> 협의(좁은 의미) vs. 광의(넓은 의미)

<strong>광의(넓은 의미):</strong> 종교개혁 초기에는 중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반적인 갱신, 즉 성화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.<br> <strong>협의(좁은 의미):</strong> 점차 신학이 발전하면서 중생은 믿음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라는 좁은 의미로 정착되었고, 믿음 이후의 과정은 '성화'로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습니다.

<span class="tag">2</span> 능동적 중생 vs. 수동적 중생

<strong>능동적 중생 (regeneratio activa):</strong>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. 이는 '효과적인 부르심(소명)'과 같습니다.<br> <strong>수동적 중생 (regeneratio passiva):</strong>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것,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.

<span class="tag">3</span> 초자연적 작용 vs. 자연적 작용

<strong>자연적 작용:</strong>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, 인간의 의식과 의지를 지향하며 역사하십니다.<br> <strong>초자연적 작용:</strong> 그러나 하나님은 이 수단에 매이지 않으십니다. 특히 유아와 같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, 말씀 없이도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여 중생케 하실 수 있습니다.

04. 중생과 불가항력적 은혜

'불가항력적 은혜' (Irresistible Grace)라는 용어

이 용어는 개혁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, 반대자들이 은혜의 유효성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입니다. 개혁파 신학자들은 '은혜의 유효성'이나 '은혜의 불굴성'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했습니다.

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저항할 수 있지만,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유효한 은혜로 역사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에는, 인간이 그 은혜를 <strong class="font-semibold">궁극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</strong>는 것입니다.

"[중생은]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, 가장 강력한 사역인 동시에 매우 부드러운 사역이며, 놀랍고, 은밀하며 오류가 전혀 없는 사역이며, 그 능력은 ... 창조나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것보다 작거나 열등한 능력이 아니다."

- 도르트 신조, III, IV, 12.

중생은 신비다

중생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오류를 거부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.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나는 지점에는 우리가 완전히 꿰뚫을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.

신비로운 중생도 증거는 있다

중생은 새로운 실체의 주입이 아니라, 인간의 내적 성품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. 이 새로운 성품(성향)은 성령의 인도 아래 삶 속에서 지성, 감정, 의지의 영역에 걸쳐 구체적인 활동들로 나타나게 됩니다.